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사라예보 사건]] ====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 사건|암살]]당했다. 사건 직후 콘라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 대공]]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부부]]의 장례식 다음날인 [[7월 5일]], [[쇤브룬 궁전]]에 방문하여 황실에 알현하였다. 콘라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조카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사라예보의 보안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에게 분노할거라 예상했으나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독일 제국|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국]]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폴트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과 지원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성 보좌관 [[https://de.wikipedia.org/wiki/Alexander_Hoyos|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 1876-1937)을 베를린에 보냈고, 베를린에서 돌아온 호요스는 [[7월 7일]]까지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돌아와 제국의회에서 브리핑을 했다. 호요스를 비롯해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외무성 장관과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전쟁성 장관, 레온 데 빌린스키 재무장관, [[카를 폰 슈튀르크]] 총리와 [[티서 이슈트반]] 총리가 의회에 참석했고 군부 쪽 인사로는 육군을 대표하는 콘라트, 해군 대표로는 전쟁성 해군부장 [[안톤 하우스]] 대장을 대신해 [[https://de.wikipedia.org/wiki/Karl_Kailer_von_Kaltenfels|카를 카일러 폰 칼텐펠스]](Karl Kailer von Kaltenfels, 1862-1917) 해군소장이 소집되었다. 콘라트와 카일러는 가능한 군사 작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호출되었기에 그 외에는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콘라트의 전쟁 의지는 [[발칸 전쟁]]때부터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카를 폰 슈튀르크|슈튀르크]] 총리와 빌린스키에게 진즉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전쟁 여론은 시간 문제였다. 더불어 베르히톨트도 찬동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콘라트는 황위 계승자가 암살 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즉각적인 전쟁을 원하였다. 무력을 써서라도 당장 세르비아를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료 장군이었던 크로바틴은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오직 티서 총리만이 망설이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이것]]은 [[가브릴로 프린치프|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국]]은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남부 슬라브인]], [[보헤미아 왕국|체코인]][* 다만 체코의 경우 처음에는 딱히 독립 여론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을 더 원했다.(물론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분리독립을 원하는 측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1차 대전에서 오헝 제국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고 제국이 패망하자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러시아 제국|러시아인]],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인]],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예방전쟁|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전쟁]]을 해야만 한다. >---- >사라예보 사건 발발 질후인 다음날, 콘라트는 제국 의회에서 이것을 구실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회첸도르프는 세르비아 왕국의 몰락을 진정 바라고 있었으며, 세르비아를 몹시 싫어했다. 이는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비공식적 통치권을 의당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반체제 세르비아인들을 유인하는 자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유화 노선을 채택해 온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마저 사라졌으니, 콘라트의 전쟁 불가피론은 제국 의회를 휘어잡았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전쟁론자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안 그래도 빛이 바래가는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정확한 수사 후에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고, 베르히톨트 또한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하기를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1914년]] [[7월]] 당시 유럽의 다른 참모총장들과는 달리 콘라트는 내각 관료들에게 자신의 전쟁 계획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콘라트는 제국과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러시아 제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각료들은 [[1913년]] [[5월]]과 [[10월]]의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결의를 보였다. [[카를 폰 슈튀르크|슈튀르크]]와 빌린스키는 국내 사정상 압도적인 전력을 과감히 사용하는것 이외의 사항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조치를 장기적으로 애매하게 했다가는 제국 경제에 원치 않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며,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분쇄되지 않는 한 유지하기 힘들것이라고 봤다. 호요스가 베를린으로 떠났던 2주간의 기간 동안 당시 많은 부대들은 콘라트가 농촌 지역의 군대가 연례 기동 전에 수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특별 여름 휴가를 미리 승인해 준 상태였었는데, 다시 곧바로 복귀를 명령하면 수확에 영향을 미칠것이고 제국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할 의도가 있다는 의혹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7월 22일, 23일은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영국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실의 단호한 결심은 전쟁의 촉구가 아닌 지연이 되어버렸다. 콘라트는 추수 휴가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16개 군단 중 7개 군단인 제3군단([[그라츠]], 제4군단([[부다페스트]]), 제4군단([[브라티슬라바|포조니]]), 제6군단([[코시체|커셔]]), 제7군단([[티미쇼아라|테메슈바르]], 제13군단([[자그레브|아그람]]), 제14군단([[인스브루크]])은 즉각 동원 명령에 응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추수가 일찍 끝나지 않는 한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 통첩은 본래 날짜보다 며칠 이상 앞서서 보낼 수가 없던 것이다. [[7월 7일]], 회의에서 콘라트는 각료들을 위한 전쟁 계획을 검토했다. 다시, 그는 계획 B(세르비아에 대한 발칸 전쟁)에 집중했고 계획 R(러시아)을 단순한 우발 사태로 취급했다. [[7월 8일]] 콘라트는 베르히톨트, 호요스 및 기타 주요 외무성 관리들을 만나 베르히톨트로부터 [[7월 22일]] 이전 "추수 후에만 최후통첩을 전달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면서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주변국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크로바틴과 함께 휴가를 떠날 것을 제안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콘라트는 [[7월 19일]], 베르히톨트의 집에서 극비리에 모임을 가졌다. 카일러 해군소장과 함께 그는 유명한 10개 조항의 초안을 작성할 때 제국의회 구성원에 합류했다. [[7월 23일]], 최후 통첩이 발송되기 몇 시간 전, 콘라트는 베르히톨트를 만나 일단 동원하면 돌이킬 수 없다며 그들의 이전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베르히톨트는 콘라트에게 동원 중 만약 세르비아가 항복한다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자 콘라트는 세르비아한테 제국이 동원을 일으키게 만든 책임을 비용으로 물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만약 [[삼국 동맹|동맹]]을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두려워해서는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은 [[https://it.wikipedia.org/wiki/Alberto_Pollio|알베르토 폴리오 중장]](Alberto Pollio, 1852-1914)으로 그는 평소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참모장과 콘라트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폴리오는 콘라트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유일한 이탈리아 장군이었다. 그랬기에 콘라트는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생각했으나 폴리오가 사라예보 사건 3일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탈리아의 동맹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이미 낙관론자들을 제외하면 제국 내부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에 충실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가 제국의 최후 통첩을 거부한 날, 콘라트는 세르비아 왕국군의 참모총장 [[https://en.wikipedia.org/wiki/Radomir_Putnik|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Радомир Путник / Radomir Putnik)[* 생몰년도: 1847년 ~ 1917년]의 운명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 푸트니크는 당일 오스트리아의 바트 글리헨베르크에 휴가를 와 있었는데, 자신의 나라가 곧 그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제국의회가 베오그라드에 최후 통첩을 보낸 후 푸트니크는 휴가를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갈아타던 중 경찰에 체포됐다. 다음날 베르히톨트는 그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호요스를 콘라트에게 보냈는데 콘라트는 푸트니크를 곧바로 풀어주기 결정한 것이었다. 베르히톨트는 푸트니크에게 베오그라드행 특별 열차를 제공해주었다. 당시 콘라트의 친구 [[https://de.wikipedia.org/wiki/Josef_Redlich|요제프 레들리히]](Josef Redlich, 1869-1936)조차도 이러한 콘라트의 행보를 "거짓된 기사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결정은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일치했다. 콘라트는 개인적인 요인에 따라 몰트케와 폴리오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보지 않았고, 1차 세계 대전 중에 적 지도자의 자질이나 능력을 자신의 전략 요소로 고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가진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을 통해 풀어보자면 콘라트에게 전쟁은 보다 더 광범위한 세력들의 충돌로 이루어지는것 뿐, 그 세력에 속한 개인(심지어 전시 장군참모장으로서 자신도 포함)은 다소 미미한 역할을 수행 한다는걸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콘라트는 전쟁을 빨리 시작하고 싶어 안달복달했었다. [[7월 25일]] 저녁,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발칸 전쟁을 위한 계획 B의 실행을 승인했다. 그러나 황제의 서명을 얻어낸 것이 무색하게도, 막상 전쟁이 터지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오헝제국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콘라트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베르히톨트가 콘라트에게 선전포고를 언제 해야 될지 질문했을때, 콘라트는 동원이 완료되고, 군사 작전이 준비가 되는 8월 12일에 선전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국군은 2주 정도 지나야 작전할 준비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베르히톨트는 외교 상황의 급박함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동원령이 발령될 경우 16만이었던 병력을 최대 330만까지 증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력의 쇠퇴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인해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절감해 왔기에 단지 병력만 늘린다고 전력이 대폭 증가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장비 수준도 높지 않았다. 그나마 당시 열강들의 제국의 [[제식 소총]] 열풍에 덩달아 만든 [[만리허 소총]]만이 자랑할 만한 무기였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방비는 독일이나 러시아의 25퍼센트 수준 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질적 수준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10년 전 [[러일전쟁]]에서 망신을 당하고 덩치만 큰 약체라고 조롱받던 러시아조차 오스트리아를 만만하게 볼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도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러시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천명했을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었으므로 까딱하다간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강을 자부하는 독일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 개시 직전에 16개 군단중에 일단 애초에 계획했던 병력의 60퍼센트 수준인 200만을 7개 군단으로 서둘러 편성할 수 있었다. 콘라트는 세르비아 침공에 50만, 북동쪽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100만, 그리고 중앙에 예비대로 50만을 할당했다. 우선 목표인 세르비아에 집중하지 못한 모양새 같았지만, 50만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오히려 작전의 성패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얼마나 막을 수 있냐에 달려 있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문제는 12개 언어[*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이디시어]], [[슬로바키아어]],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세르보크로아트어]]([[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루신어]], [[루마니아어]].]로 공표된 포고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병력의 60퍼센트 정도가 슬라브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이 세르비아나 러시아와 싸울 때 얼마나 충성심을 발휘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실제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의 병력인데, 이들도 평소에 제국의 지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서 전투력이 미지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 제국은 일단 전쟁이 터질 경우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작전 협조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1896년~1909년에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는 거의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콘라트와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소 몰트케]]가 서로 간간히 서신을 보낼 뿐이었다. 그 후 콘라트의 주장으로 양국 참모부 간의 교류가 재개되기는 했지만, 1914년 당시 양국 간에는 대러시아전을 염두에 둔 어떠한 합동 작전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향후 전쟁의 전망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독일 제국군 육군 장군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당시 총 80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처리하는 데 36일~40일이 걸리는 동안, 동부전선에서는 나머지 10개 사단으로 방어에 전념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팔켄하인의 속셈은 일단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80개 사단을 모두 동부전선에 투입해서 러시아 제국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애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반면 콘라트는 러시아의 병력 동원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감안할 때 8월 말까지는 제국군이 [[러시아 제국군]]에 대해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사이에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바르샤바 돌출부)]]의 남쪽 측면을 최우선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도 독일보다 약체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치려는 목적으로 바르샤바 돌출부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방과 측면을 칠 계획이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의견이 갈렸다. 콘라트는 항상 공세(der Offensive)로 일관하길 원했으나, 팔켄하인은 소모 전략(Ermattungsstrategie or Zermürbungsstrategie)으로서 전쟁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콘라트는 오히려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섬멸 계획(Vernichtungsplän)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양면전쟁에서의 우선순위도 논쟁거리였다. 개전때부터 팔켄하인과 콘라트는 이와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켰음에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게다가 콘라트는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도 8개 육군 군단을 배치해야만 했다. 세르비아쪽에 배치한 부대는 구경 120mm가 넘는 중포(重砲)를 오늘날 1개 포병연대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40여문만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군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제국군은 허우대만 큰 약골이었다. 이는 콘라트가 야포를 과소평가했던 탓이 크다.] 콘라트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를 원했다. 북동쪽 국경에서에 러시아군 마주하기 전에 신속히 세르비아를 침공해서 항복을 받아내야 했다. 여기서 독일이 러시아를 압박만 해준다면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개입하기 어려울것이고 제국이 손쉽게 세르비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는 독일 제국의 슐리펜 계획의 속행을 의미하였다. 제국의회는 [[세르비아 침공]]이 러시아와의 전쟁과 유럽에서의 전면전을 의미할지라도 지지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확실해지자 콘라트는 지난 며칠간.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플랜 B는 취소되어야 했고 플랜 R이 실시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는 제한적이 되었다. 문제는 콘래트가 절반의 병력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송 담당관인 에밀 라첸호퍼 소령(Emil Ratzenhofer)은 콘라트에게 세르비아 전선에서 전투를 중단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병력을 실으면 [[8월 23일]] 이전에 갈리치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8월 23일에 러시아군이 도착했지만 제국군은 약속보다 16일 늦게 갈리치아에 병력이 도착했다. 심지어 나머지 부대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철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수송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7월 31일]], 러시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양면 전쟁을 예상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나머지 8개 군단(AStaffel)을 활성화하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황제의 명령으로 육군 최고 사령부(Armeeoberkommando, 이하 A.O.K.)가 개설되었다. AOK의 총사령관에는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이가 좋은 점을 고려하여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의 영지인 [[테셴 공국|테셴]]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은 명목상의 지휘관이였고 실질적인 지휘관은 장군참모장인 콘라트였다.[* 둘은 지휘관에서 짤리기 전 2년 반 동안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제국의회는 해산되었고, 전시동안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은 군법에 따라야 했고, AOK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콘라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서 이슈트반|티서]]가 가능한 한 많은 평시 특권을 유지하면서 정부 기능을 유지했던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보스니아]]에는 총독인 포티오레크가 있었기 때문에 콘라트의 권한이 적게 닿았지만 명목상 AOK의 통제 하에 있을 뿐, 나머지 전시 자원동원은 콘라트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